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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루 로맨스, 대책없이 뜨거운 청춘의 거친 사랑 이야기
    영화 이야기/감상 2009. 6. 14. 15:26




    트루 로맨스
    감독 토니 스콧 (1993 / 미국)
    출연 크리스찬 슬레이터, 패트리샤 아퀘트, 잭 블랙, 데니스 호퍼
    상세보기



    트루 로맨스.

    <트루 로맨스>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탄탄한 시나리오에 토니 스콧 감독의 감각적인 연출, 그리고 화려한 출연진들의 멋진 연기에 한스 짐머의 감미로운 음악까지 더해져 지금까지도 많은 분들께 사랑받고 있는 영화입니다. 저도 어렸을 적에 보고 푹 빠진 이후로 지금까지도 종종 보고 있습니다. 93년도 작품이니 벌써 16년 전 영화군요. 이번 포스트는 출발 비디오 여행 수준의 스포일러가 난무하기 때문에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주의하세요.




    디트로이트

    영화는 황량한 디트로이트에서 시작됩니다. 과거 자동차 공업도시로 명성을 날렸던 디트로이트는 이른바 빅3라 일컫는 미국 자동차 회사들의 구조조정과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거센 공략으로 80년대부터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도시입니다. 그 때문인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디트로이트의 이미지는 대부분 어두운 모습이더군요. <로보캅>에서 범죄의 온상으로 그려지던 곳이 바로 디트로이트였고, 에미넴의 <8마일>도 실제 디트로이트의 8마일 로드라는 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습니다.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컬럼바인>에 나오는 디트로이트의 위성 도시격인 플린트의 모습을 통해서도 몰락한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의 어두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트루 로맨스>에서도 디트로이트의 분위기는 앞서 얘기한 영화들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춥고 황량한 공업도시의 이미지 그대로입니다. 영화의 제목인 <트루 로맨스-True Romance>와는 거리가 느껴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죠.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앨라배마의 독백에서도 그녀는 '백만년을 생각해봐도 디트로이트와 진정한 사랑-true romance-이 어울린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이 칙칙한 도시에서 클레어렌스(크리스찬 슬레이터)와 앨라배마(패트리샤 아퀘트)의 달콤하면서 뜨겁고, 애틋하면서 거칠고 파란만장한 트루 로맨스가 시작됩니다.



    클레어렌스와 앨라배마

    클레어렌스는 만화가게에서 일하며 엘비스 프레슬리와 쿵푸 영화, 만화 캐릭터들에 빠져 사는 별 볼일 없는 청년입니다. 만약 남자와 자야한다면, 꼭 그래야만 한다면 엘비스와 자겠노라고 나불거리고, 생일 때마다 심야극장에서 혼자 쿵푸 영화를 연달아 3편씩이나 보는 그의 모습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하면 오타쿠의 전형에 가깝습니다. 영화를 즐기시는 분이라면 이런 클레어렌스의 캐릭터는 작가인 쿠엔틴 타란티노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영화의 각본을 비디오 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때에 썼다고 합니다. 그가 자신의 연출 데뷔작인 <저수지의 개들>의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작가 협회가 정한 최저 금액만을 받고 팔았다는 재밌는 일화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클레어렌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일에 혼자 심야극장에서 철지난 무술 영화를 보는 도중 앨라배마와 만나게 됩니다. 텅텅 비다시피한 심야극장에서 앨라배마가 클레어렌스의 뒷자리에 앉으려다가 팝콘을 쏟으며 서로 눈이 맞죠. 앨라배마는 백치미가 느껴질 정도로 순진한 구석과 복숭아 맛의 입술을 가진 화끈한 매력을 동시에 지닌 사랑스러운 여자입니다. 둘은 서로에게 끌려 영화를 보고, 파이를 먹고, 함께 달콤한 데이트를 즐깁니다. 


    달달한 밤을 함께 보낸 후 잠결에 눈을 뜬 클레어렌스는 앨라배마가 혼자 창가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다가가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앨라배마는 사실 자신은 클레어렌스가 일하는 만화가게의 사장이 생일 선물로 보낸 콜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클레어렌스와 겨우 하룻밤을 보냈을 뿐이고 자신은 다시 콜걸로 돌아왔지만 그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얘기합니다. 클레어렌스도 그녀와 함께 보낸 지난 밤이 생애 최고의 밤이었다고 얘기하며 둘은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합니다. 그 후 이 못말리는 연인들 앞엔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황당하면서 긴장감 넘치는 상황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거친 폭력 장면이나 총격씬도 등장하지만 트루 로맨스라는 제목처럼 클레어렌스와 앨라배마의 진한 사랑이 늘 중심에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만난 지 하루도 안돼 사랑에 빠지고 좋아 죽는 이런 사랑은 말 그대로 영화에나 나올법한 황당한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제법 아기자기한 느낌으로 감성을 자극합니다. 아마도 클레어렌스와 앨라배마의 독특한 캐릭터에서 그런 느낌이 전해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의 독특한 캐릭터와 못말리는 사랑은 이런 식입니다. 앨라배마를 놔주라는 담판을 짓기 위해 포주 드렉슬에게 찾아간 클레어렌스는 결국 그를 죽이게 됩니다. 앨라배마는 드렉슬을 찾아간 클레어렌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그가 돌아와 드렉슬을 죽였다고 하자 흐느끼며 울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흥분한 클레어렌스가 그 따위 녀석이 죽었는데 왜 우는거냐고 다그치자 앨라배마는 흐느끼며 “당신이 한 일은 너무나 로맨틱해요. (I think what you did... was so romantic.)"라고 말하면서 클레어렌스에게 키스를 합니다. 




    후반부에서 앨라배마는 그들을 쫓아온 마피아(제임스 갠돌피니)에게 구타당해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그 후 공항 근처의 공터에서 클레어렌스가 앨라배마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칸쿤으로 떠나자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애틋하게 그려진 대목입니다. 

    엄청난 조연들.

    이 영화엔 데니스 호퍼, 크리스토퍼 월켄, 게리 올드만, 새무얼 L. 잭슨, 브래드 피트, 발 킬머 등 쟁쟁한 배우들이 조연으로 얼굴을 비춥니다.

    데니스 호퍼와 크리스토퍼 월켄은 클레어렌스의 아버지와 클레어렌스를 쫓는 마피아 중간 보스 역을 맡아서 서로 대립하는 멋진 연기를 펼칩니다. 두 배우가 대립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이 장면에서 클레어렌스의 행방을 알아내려는 크리스토퍼 월켄의 협박과 고문이 이어지는데도 데니스 호퍼는 전혀 굴복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시실리인에게는 흑인의 피가 섞여있다는 얘기로 시실리 출신 마피아인 크리스토퍼 월켄을 자극합니다. 결국 크리스토퍼 월켄은 아들을 지키려는 데니스 호퍼의 강한 의지에 굴복해 클레어렌스의 행방도 알아내지 못한 채 흥분해서 그를 죽이게 됩니다. 하지만 데니스 호퍼가 아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지만 클레어렌스의 행방은 어이없게도 그가 냉장고에 붙여놓은 메모지를 통해 금방 탄로나고 맙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스티븐 스필버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한 장면과 비교해보면 매우 재밌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크리스토퍼 월켄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사기 행각을 벌이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아버지로 나옵니다. FBI 수사관인 톰 행크스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쫓다가 마침내 그의 아버지인 크리스토퍼 월켄에게까지 찾아와 그의 행방을 캐묻습니다. 크리스토퍼 월켄은 아들을 보호하려는 생각으로 그가 베트남에 가 있다는 둥의 얘기로 진실을 감춥니다. 하지만 톰 행크스는 책상위에 널부러져 있던 편지를 보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소재를 알아냅니다. 크리스토퍼 월켄의 역할이 <트루 로맨스>에서와 정확히 반대였던 셈입니다. 

    크리스토퍼 월켄은 마피아 두목 역할이 꽤 잘 어울리는 배우입니다. <덴버>나 <수어싸이드 킹>에서도 마피아 두목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요, 두 영화 모두 마피아 두목으로서 크리스토퍼 월켄의 철철 넘치는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특히 <덴버>에서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말도 보조장치를 통해서만 해야하는 중증 장애인으로 등장하는데도 악랄한 마피아 두목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러고 보니 <수어싸이드 킹>에서도 비슷하군요. 대학생들에게 납치돼 의자에 꽁꽁 묶인 채 말로써만 자신을 납치한 대학생들을 상대하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보여줍니다.



    앨라배마의 포주인 드렉슬로 나오는 게리 올드만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게리 올드만은 그동안 광기어린 악랄한 캐릭터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적이 많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그의 악랄한 연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새무얼 L. 잭슨은 나오자마자 드렉슬의 총에 맞아 죽는 역할로 나옵니다.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대충 보면 잘 알아보기도 힘들죠.  

    지금은 할리우드의 거물이 된 브래드 피트도 이 영화에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항상 술과 마리화나에 취한 얼간이 역할로 나옵니다. 발 킬머는 중요할 때마다 클레어렌스에게 조언을 해주는 가상의 인물로 등장합니다. 발 킬머도 엘비스 프레슬리 분장을 한 채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취향.

    이 영화는 토니 스콧이 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각본을 쓴 쿠엔틴 타란티노의 스타일이 압도적입니다. 캐릭터 설정이나 스토리 전개는 물론이고, 등장인물들이 보고 있는 TV 속 장면까지 쿠엔틴 타란티노의 취향에 따른 설정인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클레어렌스의 아파트에서 앨라배마가 TV를 볼 때 나오는 영화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영웅본색2>의 한 장면입니다. 그리고 클레어렌스가 심야극장에서 보던 무술 영화의 주인공인 소니 치바는 타란티노의 <킬 빌>에서 하토리 한조 역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타란티노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밖에도 그는 클레어렌스의 입을 통해 무술 영화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감추지 않고 마음껏 드러내고 있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늘 이런 식으로 작품 속에 자신이 좋아하는 요소들을 가득 집어넣기로 유명합니다. <킬 빌>은 아예 영화 전체를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들에 대한 오마쥬로 가득 채운 경우였죠. 영화 팬으로서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부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렇게 좋아하는 작품이나 캐릭터, 배우들에 대한 애정을 고스란히 자신의 작품 속에 반영시키면서 재밌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타란티노는 정말 부럽더군요. 어떤 면에서는 다소 경박한 스타일이라는 비난을 할 수도 있겠지만 쿠엔틴 타란티노는 그런 비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매번 자신의 취향을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크리스찬 슬레이터와 패트리샤 아퀘트.

    크리스찬 슬레이터는 이 영화에 출연할 때만 해도 연기력과 개성을 겸비한 재능있는 젊은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불미스러운 일들로 가십을 장식하더니 요즘은 거의 존재감이 없는 배우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많이 좋아했던 배우여서 그의 몰락을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

    패트리샤 아퀘트는 이 영화에 출연한 후 니콜라스 케이지와 결혼합니다. 당시 니콜라스 케이지가 패트리샤에 대한 7년 간의 긴 구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요, 둘은 마틴 스콜세지의 <비상근무>에 함께 출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대부분의 스타 커플들이 그렇듯이 얼마가지 않아 이혼으로 끝이 납니다. 영화 속에선 하루 만에 '트루 로맨스'에 빠져 달콤한 사랑을 키워가지만 현실 속에선 7년 간의 구애도 그녀에게 '트루 로맨스'를 만들어 주진 못했나 봅니다. 역시 영화와 현실의 차이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어려서인지 클레어렌스와 앨라배마의 젊은 열정으로 가득한 사랑이야기에 거의 열광적으로 빠졌드랬습니다. 그 후 나이를 먹으며 차가운 도시 남자가 되는 바람에 저런 사랑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이라는 냉소적인 생각을 가졌었는데요, 그래도 일상이 너무 따분하고 팍팍하게 느껴질 때면 클레어렌스와 앨라배마의 액션이 가미된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가 문득 그리워지곤 합니다. 아직도 그들의 사랑이야기에 마음이 가는 것을 보면 요즘의 일상이 너무 팍팍하거나, 나이를 먹었어도 철이 없거나, 둘 중에 하나겠죠. 어쩌면 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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