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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날은 간다 - 심심한 스토리에 담긴 연애의 진실
    영화 이야기/감상 2009. 2. 10. 09:28



    봄날은 간다 - 심심한 스토리에 담긴 연애의 진실



    추억. 

    이 영화를 본 날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눈부시게 맑았던 어느 가을 날이었습니다. 고등학교때 몽글몽글 순진한 십대의 연정을 품었던 여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을 때 마냥 애달파 하기만 하던 풋내기 연정이었습니다. 입시의 압박에 시달리던 그 시절에는 마냥 생각만해도 가슴 떨리던 친구였지요. 여름방학때 만나 크리스마스 무렵까지 4개월여를 달콤한 꿈을 꾸는 듯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주말마다 영화를 보러가고, 빵집에 가고, 헤어질 땐 집에까지 바래다 주고... 그런데도 부끄러워서 끝내 손도 한 번 잡아보지 못한 풋내기 연정이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서로의 감정이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돌아서야만 했던...

    이 영화는 어쩌다가 그렇게 고등학교 때 만났던 친구와 몇 년 만에 재회해 봤던 영화입니다. 영화를 본 후 같이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길 나누었는데 조기 치매 증세인지, 당연한 현상인지 그때 무슨 얘길 했는지 거의 기억이 안나네요. 아마 그때 그녀는 자신의 남자 친구에 관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의 결과일런지도 모릅니다. 차를 마시고 나오며 앞으로 종종 만나서 차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그러자고 인사하고 헤어졌지만 그 후로 그녀를 만난 적은 없습니다. 얼핏 듣기로는 그 때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평범하지 않은 그날의 상황이 아니었더래도 <봄날은 간다>는 충분히 마음 속에 각인될 만한 영화였습니다. 뭐랄까... 이 영화에서 유지태가 연기한 상우의 캐릭터는 대한민국의 모든 실연남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강릉.

    이 영화는 <8월의 크리스마스>로 잔잔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전해줬던 허진호 감독의 두번째 작품입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영화도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를 지닌 영화였죠.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상적인 묘사가 주를 이룬 가운데 배경 또한 보통 연애 영화와 달리 휘황찬란한 서울 한 복판에서 한 발짝 떨어진 변두리와 그보다 더 떨어진 강릉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적에서 강릉에서 살았기 때문에 오죽헌에서의 데이트 장면이라던가 강릉 KBS가 화면에 나올땐 색다른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랑이 아닌 연애.

    이 영화는 대사도 거의 없고, 특별히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없이 심심하게 진행됩니다. 그런 점으로 인해 이 영화를 보고 '이게 뭐야? 하나도 재미없네!' 하고 지나치는 분도 많겠지만 이 영화의 장점은 바로 그 심심한 내용 속에 담겨진 지극히 객관적인 연애의 묘사에 있습니다. 사랑이란 말로 표현하기에도 좀 무리란 생각이 듭니다. 일단 사랑이란 말에는 뭔지 설명할 수 없어도 좀 애틋하고, 평범하지 않고, 알콩달콩 하지 않으면 안되는 뭔가가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착각과도 같은 감정이 배제된 일상속의 연애. <봄날은 간다>는 그렇게 아무곳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보통 연애를 그리고 있습니다. 겪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이 영화속의 상우란 캐릭터를 대한민국의 모든 실연남의 역할 모형이라고 얘기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 영화속에서 진행되는 군더더기가 쏙 빠진 연애 스토리를 보고 있다보면 '정말 똑같애. 정말 저래.' 이런 얘기를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분이라면 아마 연애를 또는 이별을 한번도 안해보신 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_-;



    일상.

    사실 연애를 시작하게 되는 순간을 생각해보면 그 순간은 그다지 특별하게 다가 오는게 아닙니다. 물론 그 연애를 지속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들의 첫 만남이 세상 그 어떤 커플들의 만남 보다도 드라마틱하고 특별했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착각일뿐, 연애란 것이 결국 사람사는 일상의 하나이듯이 연애의 시작도 일상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 상우와 은수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녹음 기술자인 상우와 지방 방송국 라디오 진행자인 은수는 어느 겨울날. 일 때문에 첫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들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검은 코트에 빨간 목도리를 칭칭 감은 은수. 이영애의 이미지는 정말... 이 심심한 영화에서 유일하게 향기를 뿜어내는 존재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산뜻합니다.

    어쨋든 그렇게 첫 만남을 가진 그들이 가까워지게 되는 계기도 특별한 사연에서 비롯되는게 아닙니다.



    라면.

    바로 라면 때문이죠. 훗날 견디기 힘들만큼 아픈 가슴앓이를 하게되는 상우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 망할노무 라면..'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라면은 그들이 가까워지게 되는 순간에도, 그들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꼭 등장하는 중요한 소품입니다. 누구든지 특별하지 않게 생각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라면이라는 장치는 허진호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고스란히 드러내 줍니다.

    만약 도회지 연인들의 말끔한 사랑을 그리는 세련된 멜로 영화였다면 라면 따위가 아닌 뭔가 색다른 장치가 더 어울렸을 겁니다. 

     




    착각 혹은 뻥. 혹은 열정.

    늦은 밤에 함께 라면을 끓여 먹은 이후로 둘은 급속하게 가까워집니다. 상우는 술기운에 택시를 타고 강릉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런 술주정에 가까운 객기를 부린 상우에게 은수는 "술 마시니까 멋있다~"고 합니다. 비틀거리면서 서울에서 강릉까지 택시를 타고 온 남자에게 저런 얘길 할 수 있는건.. 그들이 막 시작하는 연인이기에 가능한 겁니다. 다 뻥인 셈이죠. 뻥이란 얘기가 좀 심하다면.. 다 착각입니다. 처음이니까 그런 모습도 멋있다고 하는 거죠.

    그런 객기를 부릴 수 있는 것과 그런 객기를 멋있다고 할 수 있는 건 좋게 말하면 연애를 시작하는 연인들 사이에 쉽게 볼 수 있는 열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열정이라고 보는게 정확하겠네요. 언젠가 차갑게 식어버릴지언정 적어도 그때의 그들에겐 뜨거운 열정이란게 있었던거죠.




    둘 사이가 소원해졌을 때의 대화를 들어보면 그 점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은수를 데려다주고 일이 있다며 어디 좀 갖다오겠다는 상우에게 은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빨리와서 라면이나 끓여."

    "나 일 있어."

    "무슨일? 내가 모르는 일도 있어? 또 어디가서 술이나 마시려고 그러지뭐."

    은수의 그렇게 퉁명스런 말투에 상우도 화가 났는지 한마디 합니다.

    "은수씨는 내가 라면으로 보여? 말 조심해!"

    그런 식으로 둘 사이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 가고 은수는 거기에 더해 다른 만남도 만들어갑니다. 헤어지자는 은수의 얘기에 "내가 잘할께.."라고 이별을 막아보려던 상우도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란 말을 남기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돌아섭니다.
     



    라면으로 흥한 사랑 라면으로 망한다는 말이 있었던가요? 이별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지만, 팔팔 끓여 탱탱하던 라면이 얼마되지 않아 푹 퍼져버리듯이 사랑도 쉽게 변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보통 연인들이 그렇게 쉽게 만나서 뜨거운 사랑을 키워가다 어느샌가 차갑게 돌아서듯이 그들도 남남이 되어갑니다.

    영화에선 결혼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은수가 상우의 은근한 프로포즈를 부담스러워 하면서 둘의 관계가 멀어지는 걸로 나옵니다. 사실 이유야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이미 처음 만날때의 열정이 식어버려 이별을 준비하려는 그 혹은 그녀에게 있어 이별의 이유란 그저 스스로 합리적이려 애쓰는 일종의 도피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런 이유가 없어도 서로가 죽도록 노력하지 않는한 연애의 감정은 식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처음 만났을때의 뜨거움과 열정이 식었다고 해서 사랑의 종말이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고 하더군요.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상대방에 대한 편안함과 애착, 책임감 등의 다른 형태의 사랑이 남아 연애를 지속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다른 형태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레임과 열정만 생각하는 연인들은 서로 이런저런 트러블을 겪다가 마침내 연애의 끝을 맞이하게 되겠죠.



    이별.

    상우는 실연을 당한 입장에서였는지 은수보다 더 큰 사랑을 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별후에도 은수를 그리워합니다. 방안에 혼자 누워 울기도 하고 그녀의 집앞에서 밤을 꼬박 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은수가 다른 사람들과 여행을 떠난 곳까지 찾아가 은수의 차를 열쇠로 긁는 어떻게 보면 좀 유치하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실연 당한 남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상우의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자신만의 존재였던, 늘 함께하고, 마음을 나누었던 그녀를 이젠 다른 사람에게 보내야 한다는 현실은 남자로 하여금 마치 아끼는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 아이의 심정과 같은 감정이 들게 하는가 봅니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어느샌가 배 아픈 감정으로 변화돼 상우의 행동처럼 심술과도 같은 반응을 유발하게 되죠. 우리는 종종 신문 사회면에서 그렇게 비뚤어진 감정이 나쁜 쪽으로 극대화돼 벌어진 일들을 대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에 비하면 상우처럼 그녀의 차를 열쇠로 긁는 정도는 애교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것들은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했던 그리움과 더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범벅된 감정이 증폭되어 생기는 반응말입니다.
     



    어쩌면 상우의 반응이 그 정도였기 때문에 벚꽃 흩날리던 어느 봄날 은수가 찾아왔을때 아무렇지 않게 돌려보낼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한번 떠난 사랑이라도 그렇게 쉽게 단념하고 돌아서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사랑.. 아니 연애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왔다가 견디기 힘든 아픔을 남기고 사라져 갑니다. 그리곤 다시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것 같던 아픔도 점점 무뎌져 아무렇지도 않게 되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아무렇지도 않게 되기는커녕 그리움만 더 커져가는 연애도 있습니다. 세상과 현실은.. 보통 연애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매듭짓기를 강요하는데, 영화에서도 보고 주변에서도 수없이 봐온 보통 연애의 자연스러운 단계가 죽어도 익숙해지질 않는 그런 연애 말입니다.

    그런 연애를 하는 이는 풋풋한 설레임 가득한 새로운 사랑을 기대하기 보다는 늘 자신의 사랑이 마지막이기를 바랍니다.

    이제 또 봄이 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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