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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데 술이 마시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출출할 때 이런저런 먹을거리를 사다가 반주로 곁들이는 식이다. 치킨을 시켜 먹을 땐 맥주, 순대를 사왔을 땐 소주, 어쩌다 엄마한테 전을 얻어왔을 때는 막걸리, 이런 식으로. 그런데 맥주나 소주를 마실 때와 달리 막걸리를 마시고 알딸딸해지면 유난히 예전 기억에 빠져들며 홀로 센치해지곤 한다. 막걸리를 마시고 취한 적이 드물기 때문일까? 막걸리는 자주 마시는 술이 아니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막걸리는 내가 처음으로 맛 본 술이다. 나이가 들어 본격적으로 맥주와 소주를 마시기 전에도 막걸리를 종종 먹었던 기억들이 있다.
1. 뱀골 할아버지와 막걸리.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외할아버지, 친할아버지 모두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엄마의 외삼촌인, 내게는 촌수도 가늠하기 쉽지 않은 할아버지 한 분에 대한 기억뿐이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분이셨는데 늘 막걸리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뱀골이란 마을에 사셨기에 뱀골 할아버지라고 불렀었다. 뱀골은 내가 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언젠가는 나와 누나, 그리고 사촌 누나 둘과 뱀골 할아버지 댁에 놀러갔는데 할아버지가 마루에서 홀로 막걸리를 드시고 계셨다. 생굴을 초고추장에 찍어서 안주로 드시는 중이었다.
마루에 앉아서 할아버지가 막걸리를 드시던 모습을 지켜보던 누나들은 짓궂게 내게 막걸리를 먹어보라고 시켰는데 할아버지도 말리지 않았다. 그 중에 유일하게 남자 아이였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따라주는 막걸리 한 사발에 생굴을 찍어먹고는 캬아~ 이러면서 까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부터 입맛은 이미 아저씨. -_-;;) 시큼달큼한 막걸리 맛이 왠지 익숙하고 좋았다.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누나들은 한잔 더 마셔보라고 부추겼고, 혼자서 적적하게 술을 드시던 할아버지도 먼 손주들의 방문에 흥이 나셨는지 내게 막걸리를 더 따라 주셨다. 겁도 없이 두 사발을 연거푸 마시고 까불던 나는 꽤 어질어질해져 그만 마루에서 굴러 떨어졌다. 다행히 어디 다친데는 없었고 나도 누나들도 할아버지도 모두 한 바탕 큰 소리로 웃었다.
아마 이 때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할아버지 댁은 누추했고 할아버지도 취해 있을 때가 많았기 때문에 누나들이나 나나 조금만 머리가 굵었어도 그곳에 놀러가는 일은 없었을 거다. 실제로 그 후로 몇 년 후, 엄마에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을 때까지 할아버지 댁에 놀러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시집 간 사촌 누나들은 아직도 가끔 만나면 그 때 내가 할아버지에게 막걸리를 넙죽넙죽 받아 먹던 얘기를 꺼내며 즐거워 한다.
2. 할머니의 술빵과 막걸리국밥.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기억은 생각해보면 몇 년 안되는 것인데도 여러가지 일들이 시간순대로 정리돼 있지 않고 조각조각 흩어져 있다. 아직 사촌 동생들이 태어나지 않았던 서울의 막내 이모 집에 갔던 일, 지금은 돌아가신 외삼촌이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 채석장 같은 곳에 데리고 갔던 일 등. 정확히 몇 살 때인지 기억나지 않는 일들이 흐릿하면서도 어떤 장면만큼은 지금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다.
강릉 큰집에서 지내던 일도 그렇다. 이때의 기억 중에는 지금 생각해도 특이한 것이 있다. 할머니는 가끔 막걸리로 밀가루 반죽을 해 술빵을 만들어주곤 했는데 요즘과 달리 군것질꺼리가 많지 않던 때여서 무척 맛있게 먹었었다. 특이한 기억은 술빵에 관한 것이 아니고 할머니가 막걸리에 밥을 말아 드시던 것이다. 당시 할머니는 종종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막걸리에 밥을 말아 드셨었다. 동네 할머니들도 함께였던 것을 보면 일상적인 식사때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워낙 어렸을 때라 어렴풋하게만 기억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지금 살고 있는 외가쪽(전북)에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아마 강원도만의 풍습이었던 듯.
3. 절에서의 첫경험.
초등학교 친구 중 집이 절인 친구가 있었다. 방이 많다는 이유로 종종 토요일엔 친구들끼리 모여서 놀다가 그곳에서 자곤 했다. 초등학교 5~6학년 무렵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친구들 여러명이서 그 친구네 집에 놀러갔는데 친구네 사촌 형이 있었다. 지금 가늠해보면 아마 20대 초반 정도 되는 형이었던 것 같다. 그 형은 어린 우리들을 데리고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장난도 치고 그랬다. 그렇게 놀던 중 형이 어딘가에서 1.5리터짜리 페트 병을 들고왔다. 안에는 막걸리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절에서 담근 곡차였다.
친구네 사촌 형은 우리를 보고 그 막걸리를 다 마시면 만원을 준다고 했다. 그 시절 만원은 꽤 큰 돈이었다. 대 여섯 명의 친구들 중 나와 다른 친구 한 명이 도전하겠다고 했다. 그러곤 둘이서 잔도 없이 번갈아가며 페트 병에 입을 대고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다. 겨우 초등학생 밖에 안된 녀석이 만원에 눈이 멀어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다니. 무모할 뿐만 아니라 불경스럽기까지 한 짓이었다. 결론을 먼저 얘기하자면 우린 내기에 이겨서 만원을 탔고, 5천원씩 나눠 가졌다.
당연히 쉽게 이긴 것은 아니다. 벌컥벌컥 막걸리를 들이키던 중 갑자기 오바이트가 쏠려 마당으로 뛰쳐나가 그날 점심 때 먹은 것을 다 토해내기도 했다. 위에 있어야할 콩나물이 역류해 코로 삐져 나왔던 기억이 특히 생생하다. 생애 처음으로 술 먹다가 토했는데 그 장소가 아직 해도 지지않은 고즈넉한 사찰 마당 한 귀퉁이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술 마신 후 토한 것이 채 다섯 번이 안될 정도로 술 마시는 것에 비해 토를 잘 안하는 편이다. 하지만 한 번 했다하면 꼭 하지 말아야할 장소에서 사고를 치는 불상사를 겪었는데, 아무래도 저 때 부처님께서 단단히 노하신 것이 분명하다.
4. 숙취의 제왕, 약주와 막걸리의 조합.
몇년 전,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전주 국제영화제 기간에 전주의 어느 복고풍 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신 적이 있다. 간판에 신성일과 엄앵란이 그려져 있는 술집이었는데 며칠 전 그곳에서 김정은과 유지태를 봤다는 여자친구의 손에 이끌려 가게 됐다. 사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전주 영화제 기간에 술집에서 유명 감독이나 배우들과 마주치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영화제 기간에는 감독이나 배우들이 많이 내려오니까 딱히 유명한 집이 아니라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도 마주칠 수 있다. 나는 그저 흔한 프랜차이즈 주점인 피쉬 앤 그릴에서 외국 게스트들과 맥주를 마시던 봉준호 감독을 본 적도 있다.
아무튼 그날 갔던 술집은 긴 머리의 범상치 않은 외모를 지닌 주인장 아저씨가 알바생도 없이 요리며 서빙이며 모두 혼자서 도맡아서 하던 곳이었다. 60년대의 산수 교과서 같은 자질구레한 소품과 소주병 뚜껑을 이어서 천장에 걸어놓은 것 등이 눈에 띄었다. 주인장 아저씨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아하니 허름한 복고풍의 컨셉이 단순히 컨셉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안주를 하나 시키면 30분은 족히 걸렸다. 어떤 술을 마실까하고 메뉴판을 보는데 '덕산 약주'라는 글씨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전에 약주를 마셔본 적은 없는데 이날따라 왠지 약주를 마시면 건강해질 것만 같은 느낌에 그 술을 시켰다. 약주는 먹을 만 했다. 그런데 한 병의 양이 꽤 많아 혼자 마시다 보니 상당한 취기가 올랐다.
거기서 그만뒀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들어서 무슨 구기자 막걸리였나를 한 주전자 더 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두 번째 시킨 막걸리는 다 마시지도 못하고 일어섰다. 차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서부터 속이 좋지 않아 도로 한 가운데에 차를 세우고 구토를 했다. 고통의 시작이었다. 집에 와서도 두어번 더 변기를 붙잡고 꾸웩거리다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갈증 때문에 냉수를 마셨는데 물을 마시자마자 또 토를 했다. 하루 종일 속이 다 비도록 아무것도 못 먹고 맹물까지 모두 게워냈다. 지금까지 술을 아무리 마셔도 머리는 좀 아플지언정 속이 안좋았던 적은 없는데 이 날은 술 먹고 속이 울렁거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확실하게 경험했다.
나름대로 원인을 진단해봤더니 약주를 마신 후, 막걸리를 마셨던 것이 문제인 듯 했다. 다른 종류의 술을 섞어 마시면 뒷끝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걸리+약주의 조합은 가히 숙취의 제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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