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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 - 달콤한 사랑, 서러운 이별
    영화 이야기/감상 2009. 2. 11. 23:00




    폐농양을 앓고 있는 은희(임수정)는 시골 요양원에서 8년째 요양중입니다. 클럽을 운영하며 제멋대로 살던 영수(황정민)는 사업이 망하고, 심각한 간경변까지 얻어 어쩔 수 없이 요양원을 찾습니다. 둘은 사랑에 빠져 요양원을 나와 한가한 시골 마을에서 함께 살며 서로 진심으로 아끼고 보살펴 줍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한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은희의 지극한 보살핌과, 가난하면서도 여유로운 시골 생활로 영수의 몸상태는 날이 갈수록 좋아집니다. 건강을 되찾자 영수는 은희를 버리고 다시 예전의 쓰레기 같은 생활로 돌아갑니다. 애초에 1회용 비닐봉투 값을 아끼면 1년에 5천원은 절약할 수 있겠다고 얘기하는 여자와 하룻밤 술값으로 2백만원이 넘게 썼다는 남자가 오랫동안 함께하리란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을 겁니다.

    허진호 감독의 4번째 작품인 <행복>은 그의 작품이 늘 그렇듯 남녀간의 연애사를 느릿한 호흡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과 달리 <행복>은 좀 더 극적입니다. 간간히 꽤 재밌는 유머도 등장하고, 은희와 영수는 전작의 그 누구보다 자기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이별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역시 전작의 캐릭터들과 사뭇 다릅니다. 참 서럽게 울기도 많이 웁니다. 

    허진호 감독은 이미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죽음을 앞둔 인물의 이야기를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정원(한석규)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끝까지 자신의 병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떠납니다. 하지만 <행복>에서 은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병에 관해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게 말합니다. 사랑에 빠진 후에는 자신이 죽을 때 꼭 옆에 있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변심에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전혀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자신에게 이럴 수 있냐고 욕을 하고, 울면서 매달리기도 합니다. 자신이 싸준 짐을 들고 떠나는 영수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도 서러운 울음을 터뜨립니다. 매정하게 은희를 버린 영수도 훗날 그 누구보다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게 됩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는 주인공들이 우는 모습이 꼭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우는 모습은 기껏해야 혼자 잠자리에 누워 흐느끼거나, 치매에 걸린 할머니 품에 안겨서 칭얼대듯이 울거나, 여관방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면서 콧물을 질질 흘리며 소리없이 우는게 전부였습니다. 다시 말해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선 주인공들이 우는 장면에서조차 관객들은 '작가주의 멜로 영화'가 보여주는 잔잔한 묘사에 고개를 갸우뚱해야 했던 적이 많습니다. 이렇게 잔잔한 묘사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어떤 이들에게는 마치 자신이 울고 있는 상황처럼 느껴질 정도로 온 가슴에 와닿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쟤 왜 울어? 열라 짱나 질질 짜기나 하고'라는 빈정거림을 유발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취향이 다 같을 수는 없기 때문에 누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얘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눈여겨 볼 만한 점은 <행복>에서는 허진호 감독이 그동안 보여줬던 것과 다른 태도의 변화가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이 스스로 영정 사진을 찍을 때 영정 사진에 검은 리본이 겹쳐지면서 잔잔하게 그의 죽음을 묘사한 것과 달리 <행복>에서는 아예 은희의 시신에 염을 하고 마지막에 삼베로 얼굴을 덮는 장면까지 친절하게 보여줍니다. 영수가 그 모습을 보며 우는 것은 물론이고 뒤이어 은희의 옷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하는 장면까지 등장합니다.

    왠지 허진호 답지 않은 이런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니 너무 대놓고 통속적인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행복이 7~80년대 호스티스 멜로의 뒤를 잇는 통속극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병약한 여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한 남자를 사랑하지만 결국 그에게 버림받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도 그를 향해 먼저 손을 내미는 모습은 진정 통속의 극치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정쩡했던 <외출>을 떠올려보면 차라리 이렇게 통속적인 모습이 나은 것 같습니다.





    수다 1. 아침저녁으로 추운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가을 날에 멜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참 고역스러운 일입니다. 아무때나 따뜻하게 손을 잡아 줄 누군가가 곁에 없다면 말이죠. 게다가 그 영화가 청초한 이미지로 유명한 수정양의 눈물 연기를 실컷 접할 수 있는 것이라면... 

    수정양이 엉엉 울때마다 제 가슴도 미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래도 울지는 않았는데 하필이면 슬픈 장면이 펼쳐질 때 마다 코가 나와서 곤혹스러웠습니다. 표안나게 코를 들이마셨는데 옆에서 보면 영락없이 훌쩍거리면서 우는 모양새였습니다. 다 큰 머스마가 영화 보면서 훌쩍거리는 모습이 우스웠는지 바로 옆에 앉은 아주머니께서 아주 대놓고 '얘 뭐니?'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더군요. '저 우는 거 아니거든요?'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참았습니다. 전후좌우로 온통 커플 관람객들 뿐이던 그 곳에서 비커플 신분의 저는 그저 얌전히 있는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함께 갔던 친구 녀석도 훌쩍거리는 저를 민망해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게 조조로 보자니깐...


    수다 2. 행복을 본 후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진 채로 지내야했습니다. 하고싶은 얘기는 많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 상태가 계속됐습니다. 수정양의 눈물이든, 황정민의 변심이든, 그들의 사랑은 쉬운 멜로의 공식대로 진행되는 것이었는데도 쉽게 떨쳐버리기 힘든 여운을 남깁니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의 변심을 겪어야했고, 변해버린 그 사람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은희처럼 마지막까지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을까요? 그는 내가 내미는 손을 잡아줄까요?

    내겐 은희처럼 복받쳐오르는 감정을 못이겨 욕지거리를 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함께한 시간이 무색하게 어느날 갑자기 이별의 순간이랍시고 인스턴트 메신져를 통해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습니다. 나는 아팠습니다. 은희는 이별 후에 영수에게 아무 연락도 취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영수를 다시 보게 됩니다. 하지만 나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인내심이 대단한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에 보고싶어 견딜 수 없을 때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전화를 했습니다.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을때 이미 내 전화는 그의 휴대폰에서 수신차단이 된 상태였습니다. 사과의 메세지를 보내려 했던 이메일조차 수신거부가 됐습니다. 은희처럼 휴대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이 살았어얄랑가 봅니다. 그러면 적어도 언젠가 진정으로 그가 보고싶을 때 한번은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젠 앞으로 한번도 볼 수 없는 남남이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이렇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슬픈 멜로 영화의 캐릭터에 스스로를 대입시키는 유치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것은 단지 지금이 깊은 가을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떠난 계절이 가을이기 때문인 것도 아닙니다. 함께 변치않는 것은 아름다운 사랑이지만 홀로 변치않는 것은 추한 미련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던 연애의 감정이 어느날 갑자기 차가운 가을 밤공기와 함께 사라지고,  그에 대한 그리움 조차도 미련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상황에 직면하게되면 선택의 기로에 서게됩니다. 씩씩하게 모든 것을 잊고 더 나은 상대방을 만나 행복해질 것이라고 허풍을 치거나, 어느 날엔가 늘 그리던 그를 앞에 두고 손을 내밀 수 있을 날을 미련스럽게 기다리거나... 나는 허풍쟁이가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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